예수님 얼굴
2019. 4. 29. 09:26ㆍ카테고리 없음
예수님 얼굴
불과 두 손을 위 아래로 펴서 가리면 가려지는 얼굴의 면적. 그 안에서도 눈썹 2군데, 눈 두군데, 코 하나 입 하나 양쪽에 귀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아무데나 있어서는 안되며 바로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restriction 까지 있지요. 이 조건 아래서 70억개의 얼굴 모습이 다 다르다? 하나님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시지요.
꿈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무덤가에 서 있었습니다. 지금 막 파헤쳐진 짙은 갈색 흙은 아직도 그 흙더미에서 흙 냄새와 수증기가 일고 있었는데 그 무덤 구덩이 뒤쪽 약간 언덕위에서 나를 보고 서 계셨지요.
무슨 일을 막 마치신 모습이었는데 머리카락들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머리에 더덕 더덕 붙어 있었습니다. 20대 말이나 30대 초반으로 무척 강건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었는데... 그만 생각에 "아...무슨말을 해도 나를 잘 이해 해 주시고 도와주시겠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와 평강 그리고 믿음직함에 대한 강한 끌림이 내게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단아한 얼굴 모습으로 나를 보고 서 계셨는데 영화에서 보던것 같은 하얀 옷에 붉은 가운을 걸치셨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로 부터 큰 소리가 났습니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당시 이 말씀이 들릴때는 어디서 무슨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몰랐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도 수년간의 신앙 생활 후에 접한 이 말씀을 알고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격하고 많이 울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특히 내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목사님 전도를 받으실때에 목사님을 통하여 주어져서 아버님으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한 말씀 (고린도 후서 5장 15절 말씀) 의 다음 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꿈에서였지만 예수님 얼굴 모습은 내 뇌에 아니 전신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뵙고 싶어졌습니다. 문제는 지금은 평생 잊어버릴것 같지 않지만 내 기억이 과연 얼마나 이 예수님 얼굴 모습을 기억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은 겁니다. 그 얼굴을 보고 난 다음 날, 집 안에 걸려있는 모든 예수님 초상화가 전혀 꿈에서 만난 그 분의 얼굴과는 거리가 아주 먼... 아니 그 보다는 아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부 내려서 버리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그대로 벽에 붙여 놔둘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내인 김민정 권사의 만류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으나 불만이 생겼습니다. 차마 보고 싶지도 않았지요. 계속 보다보면 어쩌면 진짜 얼굴을 잊게 될까 걱정마져 들었습니다.
다시 보고 싶음은 그리움으로 변하더니 드디어 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후 각 나라들을 출장 다닐 때마다 미술 박물관에 일부러 가서 성화들을 자세히 둘러 보게 되었고 바로 그 그리운 '내가 만난 예수님" 의 얼굴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날 한가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가장 은혜로운 방법으로 나타나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잘 못 표현한 탓인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예수님의 얼굴이 또 나타났습니다.
신령한 예수님의 영성은 결국 형상없는 보혜사 (성령님) 로 보내지시어 오늘날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가?
그래도 아쉽고 보고 싶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이미 성경에 써 놓으시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요 16:22-23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그 때는 속 시원하게 나의 구원자를 뵙고 기쁨으로 또 감격으로 그 소매자락을 붙잡고 영원토록 벅찬 감격과 희열로 채워주실 것을 진실로 진실로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지구에는 약 70억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들 모두는 다 다르게 생겼지요. 비단 쌍둥이라고 해도 잘 살펴 보면 다릅니다.
불과 두 손을 위 아래로 펴서 가리면 가려지는 얼굴의 면적. 그 안에서도 눈썹 2군데, 눈 두군데, 코 하나 입 하나 양쪽에 귀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아무데나 있어서는 안되며 바로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restriction 까지 있지요. 이 조건 아래서 70억개의 얼굴 모습이 다 다르다? 하나님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시지요.
꿈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무덤가에 서 있었습니다. 지금 막 파헤쳐진 짙은 갈색 흙은 아직도 그 흙더미에서 흙 냄새와 수증기가 일고 있었는데 그 무덤 구덩이 뒤쪽 약간 언덕위에서 나를 보고 서 계셨지요.
무슨 일을 막 마치신 모습이었는데 머리카락들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 머리에 더덕 더덕 붙어 있었습니다. 20대 말이나 30대 초반으로 무척 강건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었는데... 그만 생각에 "아...무슨말을 해도 나를 잘 이해 해 주시고 도와주시겠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와 평강 그리고 믿음직함에 대한 강한 끌림이 내게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단아한 얼굴 모습으로 나를 보고 서 계셨는데 영화에서 보던것 같은 하얀 옷에 붉은 가운을 걸치셨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로 부터 큰 소리가 났습니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당시 이 말씀이 들릴때는 어디서 무슨 정확한 내용인지 잘 몰랐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도 수년간의 신앙 생활 후에 접한 이 말씀을 알고는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격하고 많이 울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특히 내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목사님 전도를 받으실때에 목사님을 통하여 주어져서 아버님으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한 말씀 (고린도 후서 5장 15절 말씀) 의 다음 구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꿈에서였지만 예수님 얼굴 모습은 내 뇌에 아니 전신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뵙고 싶어졌습니다. 문제는 지금은 평생 잊어버릴것 같지 않지만 내 기억이 과연 얼마나 이 예수님 얼굴 모습을 기억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은 겁니다. 그 얼굴을 보고 난 다음 날, 집 안에 걸려있는 모든 예수님 초상화가 전혀 꿈에서 만난 그 분의 얼굴과는 거리가 아주 먼... 아니 그 보다는 아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부 내려서 버리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그대로 벽에 붙여 놔둘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내인 김민정 권사의 만류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으나 불만이 생겼습니다. 차마 보고 싶지도 않았지요. 계속 보다보면 어쩌면 진짜 얼굴을 잊게 될까 걱정마져 들었습니다.
다시 보고 싶음은 그리움으로 변하더니 드디어 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후 각 나라들을 출장 다닐 때마다 미술 박물관에 일부러 가서 성화들을 자세히 둘러 보게 되었고 바로 그 그리운 '내가 만난 예수님" 의 얼굴을 찾으려 했습니다.
뉴욕의 Metropolitan museum of art, Washington 의 Smithsonian institute of art,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완전히 뒤졌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루불 박물관 안에도 안계시더군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이자 스페인 최대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에도 물론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30년이 지나도록 그 얼굴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느날 이었습니다. 장영춘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고 우연히 본인이 꿈에서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가뜩이나 감격의 기억을 더듬으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며 말씀을 하시는데 … 아니 이게 왠 일입니까? 지금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내가 본 예수님 보다 우선 훨씬 연세가 드신 분이었으며 모습도 많이 다르신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내 가슴속에 남겨주신 만큼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큰 감격으로 목사님을 잡고계심을 본 것입니다.
그 날 한가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가장 은혜로운 방법으로 나타나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나의 집요한 예수님 진짜(?) 얼굴 찾기는 급기야 내 친구 화가인 이상남을 자극했고 그가 예수님을 그려주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우리 온 가족이 둘러서 기도하는 모습이라며...
내가 잘 못 표현한 탓인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예수님의 얼굴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신령한 예수님의 영성은 결국 형상없는 보혜사 (성령님) 로 보내지시어 오늘날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 않은가?
그래도 아쉽고 보고 싶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이미 성경에 써 놓으시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요 16:22-23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그 때는 속 시원하게 나의 구원자를 뵙고 기쁨으로 또 감격으로 그 소매자락을 붙잡고 영원토록 벅찬 감격과 희열로 채워주실 것을 진실로 진실로 소망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