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8. 03:55ㆍ카테고리 없음
신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시 119 :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8월 30일을 드디어 마지막으로 왼 팔로 부터 그 동안 받아 왔던 투석을 그쳤습니다.
제가 팔을보고 말했지요. "팔아 너와 나는 이제 살았다" 오랜 동안 투석을 하느라 엄청 굵고 긴 두개의 주사 바늘로 시달려 온 왼 팔의 혈관은 이제 멍들고 퉁퉁 부풀어져 그 모양이 험했습니다. 제 눈으로 보아도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은 모습이었지요.
작년 2월 15일 살던 중 뉴저지에 가장 눈이 많이 내렸던 날. 그 날 아침 도로에 자동차 한 대를 찾아 볼 수 없는 폭설 속에서 Hackensack Hospital Emergency 에 들어 갔습니다. 엄청난 눈으로 인해 이 큰 병원 Emergency 에 들어 온 환자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두 달 전 부터 몸을 잘 움직 일 수 없더니 전 날 저녁에는 몸을 소파에 기대고 앉았는데 등쪽이 뭉쿨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등까지 물이 차 오른 것이었습니다. 몸 전체가 붓고 (Swelling ) 숨이 가빠지는 (Short Breath) 가운데서도 잠이 아주 무겁게 들어오는데 정신이 사알짝 놓아지려 하면서 편안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낮에 한의원에 붓기 빠지는 약을 지으러 갔다가 크리스챤 한의원 원장 선생님이 내 상태를 보시고는 하시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잠이오며 편안해지면 즉시 병원 Emergency 에 들어가고 교회에 기도 부탁을 하세요” 나는 깜짝 놀라 쏟아져 들어 오는 잠을 참았습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잠이 들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이 아니 영원히….
이 후 약 2년 가까이 하루에 3시간 30분씩 그것도 일주일에 3번을 하루 걸러 한 번씩 단 한 번도 결석을 못하고 해 온 투석.... 크리스마스도 새해 정월 초 하루도 생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아니 예외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투석
정말 힘들었습니다.
투석을 하러 투석실에 들어 갈 때는 조금씩은 걸을 수 있으나 투석을 하고 나올 때는 반드시 휠체어를 타고 나와야 했습니다. 너무 어지럽고 힘이 완전히 빠져있기 때문이지요. 아니 기가 다 빠진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도 하드만 나는 왜 그렇게 안되는지….. 게다가 두 다리에서 오는 통증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원이 꼭 물어 봅니다. “0번에서 10번까지 놓고 당신의 통증 정도를 말해 주세요” 그럼 나는 꼭 “10” 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사자가 얼룩말에게 뛰어가서 덮치고 넘어 뜨린 후 아주 급하게 그 허벅지를 큰 이빨로 물어 뜯어내는 그런 고통이라고 말해 주곤 했지요. 누구나 다 이런 통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유난히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투석실에 들어 가면 우선 스스로 저울 위에 서서 몸 무게를 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오늘은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몸에서 빼야 하는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몸에서라기 보다는 피에서 라고 해야 합니다.
신장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지요. 피에서 독소를 빼주고 온 몸 세포에 대하여 물 조절을 해 줍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신장에 문제가 생겨 투석을 하는 동안은 신장이 역활을 제대로 못하므로 일체 소변을 볼 수 없습니다. 신진대사의 기본이 막히니 마시는 모든 물은 몸 안에서 출렁거리게 되고 많은 물을 마시게 되면 심장이 압박을 받게 되지요 결국 언제 심장마비를 일으킬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원에서는 하루에 마셔야 하는 물의 양을 절대적으로 제한을 합니다. 즉 하루에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은 1리터 (Liter) 가 전부입니다. 실은 이 양은 온전한 물 만의 양이 아닙니다. 수분이 많이 섞인 음식으로 부터의 물의 양도 포함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이상은 절대로 위험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더 마실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 만큼 생명에 위협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니 소변을 본다는 것은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일로 남아 버립니다. 우리 큰 아들이 집에 와서 가끔 소변 볼 때면 그야말로 화장실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얼마나 부럽던지요.
나는 거의 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시기를 좋아하는지 …. 물론 물은 말 할 것도 없도 그 외에도 평소에 우유, 쥬스, 커피, Tea, 각 종 Soda….그리고 맥주, 와인 등 아무튼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물을 제한 하는 겁니다. 물론 마셔서 오히려 몸으로부터 수분을 더 많이 빼 나가는 각종 Soda 등 음료수는 물로 치지도 않습니다. 소다와 커피 그리고 tea 등은 오히려 몸 안의 각 세포로 부터 물이 더 많이 빠져 나가게 하므로 그 물의 부피가 몸 안에서 자리잡는 비중을 크게하여 매우 해롭습니다. 도무지 물이 몸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더 압박만을 주는 것이지요. 하루 1리터…..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힘들었던 부분 이었습니다. 아니 고문이었습니다. 목은 타다시피 하나 많이 마시면 절대로 안된다니 우선 잔의 사이즈를 줄입니다. 소주잔을 정해 놓고 물을 가득(?) 따라 놓은 후 입을 대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마시는데 그 작은 양이 들어 가더라도 목구멍과 닿는 시간을 더 해 보려고 애를 쓰는 거지요. "하나님 물을 실컷 마실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기도 도 했습니다.
투석을 하는 의자에 앉으면 간호원이 와서 기계에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빼야하는지 숫자를 쳐서 넣습니다. 이 때 온 신경은 그 디지탈 스크린으로 쏟아지게 되는데 숫자가 높으면 그 만큼 몸이 부데끼고 힘이 듭니다. 정해진 시간에 물을 많이 빼야하기 때문이지요. 물을 피로 부터 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휘질대로 휘지게 되지요. 물을 좀 덜 마시고 올 걸....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가느다란 가시 하나가 어쩌다 몸에 박히는 것도 잘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투석을 위해 약 7센치 정도의 길고 굵은 바늘 2개나 팔을 찌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는 피가 나가는 바늘 하나는 들어가는 피를 위한 바늘입니다. 서로 엇갈려 혈관을 찌르는데 간호원의 경험과 성격 그리고 그 날 컨디션에 따라 누구는 단 번에 혈관에 적중하지만 5번에 2번 정도는 정확지 않아 바늘을 넣다 다시 뺏다 하며 심한 고통을 주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고 견디기 힘들지만 그렇게 긴 바늘을 꽂아 놓은채로 3시간 30분을 누워있어야 합니다. 나의 혈관은 유난히 가늘었습니다. 우선 혈관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굵고 긴 바늘을 끼어 넣는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결국 혈관 확장 수술을 따로 했는데 그것도 첫 번은 실패해서 2번이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혈관 확장 수술 후에는 피가 손 바닥까지 충분히 가지 못하고 중간에 팔뚝 끝에서 역류를 시키는데 ...지금도 흔적으로 남아 있지요.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팔을 내 밀고 만져 보라고 하면 잠시 조심해서 살짝 만져보다가 기겁을 합니다. 피가 역류하며 튀어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투석이 완전히 끝 난 지금은 혈관을 다시 원상복구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해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지요. 수술.... 생각 조차 하기도 싫습니다. 총 19번의 수술을 했으며 그 중 6번은 6시간 이상 전신마취를 하였던 대 수술이었습니다. 수술방을 다 외우다시피 했지요. 이 지경이 되면 수술의 "수" 자만 들어도 전신에 소름이 끼치게 됩니다.
담당 의사인 Dr. Geffner 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 처럼 이렇게 수술 많이 한 환자가 또 있으며 나는 왜 이렇게 유별난 것인지?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랬더니 그의 입술을 내 귀에 가까이 대며 “Who Knows!” 하는데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더라고요. 자기가 고친다고 했으면 오히려 불안했을 것 같았지요. “맞아, 하나님께서 하시지….”
처음 신장 이식 수술은 단 한 번으로 대성공. 수술은 잘 되었지만 그 동안 신장이 망가지기까지 이미 온 몸은 혹사가 될대로 된 후에 마지막으로 신장이 버티다 못해 망가지는 모양입니다. 나는 수술 후에 수술한 부분을 꿰멜 수가 없었습니다. 온 몸의 모든 세포가 그 동안 over 해서 머금고 있던 물을 다 토해내기 시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술자리를 꼬매고 나면 물을 또 계속 밖으로 뿜어 대니 도무지 아물지를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술자리를 열어 놓고 마르기를 기다리는데 운부 속에 거즈를 넣고 하루에도 몇 번씩을 흠뻑 젖은 꺼즈를 바꾸어야 합니다. 나중에는 집으로 출 퇴근 하는 간호원을 쓰긴 했지만 거의 많은 부분을 아내가 감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제대로 되지 않게되자 나중에는 Suction Pump 를 매고 다니며 24시간 몸에 부착을 한 상태로 3달을 지내야 했습니다. 몸이 한 번 물을 머금고 조절이 안되어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오랜 동안 물을 쏟아내게 되는 모양입니다. 물론 매일 처럼 또 마시는 물 역시 포함이 되겠지요.
누군가 투석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투석 후에 집으로 데리고 가야하기 때문에 대기실에서 꼼작없이 3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기도 그렇고 저러기도 그런 아주 애매한 시간이지요. 대 부분은 투석 환자가 투석을 하는 동안은 가족들은 병원에서 멀리 못 떠나고 그 부근으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다시 시간에 맞추어 병원 투석실로 돌아 오는데 유독 아내는 밖에서 꼬박 3시간 30분을 기다렸다가 완전 지쳐 빠져서 처진 모습으로 투석실에서 나오는 나를 맞이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부축하여 차에 태웁니다.
'투석실 인근에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환자를 기다리는 사람 마저도 언제까지 일지 모르는 투석에 환자보다 먼저 머리가 도는수가 있다' 는 선배 (?)들의 조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줄창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대기실 식구들은 손 바닥만한 창문으로 투석실 안을 볼 수 는 있으나 여러가지 위생상의 이유로 철저하게 출입은 차단 되어 있습니다. 거의 눈을 떼지 않고 그 작은 창으로 나와 나의 피를 돌리고 있는 기계를 보고 있다가 기계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싸인을 하면 아내는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속히 내 기계 쪽으로 가 보라고 간호원들에게 손짓을 합니다. 순 한국식이지요. 엄청난 특수 훈련을 받고 이곳에 파송되어 온 간호원들을 100%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혹 기계가 작은 시그날과 빛을 함께 보낼때가 있지요. 피를 순환 시키다가 공기가 들어가든지 무언가 조금이라도 발란스가 깨지면 예민한 Sensor 가 작동하여 간호원을 부르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투석을 하는 기간 동안 실제로 두 사람이 투석 중에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번은 그 할아버지가 대기실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다른 환자가 방으로 들어오자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참 특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할아버지 한테 저런면이 있었구나.... 대 부분의 환자들은 눈에 총기가 빠지고 힘없이 아니 소망이 없는 눈을하고 그저 물끄러미 초점 없이 앞 만 보고 앉아 대기실에서 기다리는것이 보통의 경우 인데 그 날 그의 행동은 참 의외의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투석 중 건너 편 Aisle 에서 기계가 붉은 빛을 발하며 Signal 을 내었습니다. 그 때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주 특이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계로 부터 특별한 소리가 나자 그 투석실 안에 있던 약 15명 정도의 간호원들이 갑자기 한 편에 한 명 씩만 남기고 부산히 움직이더니 환자 옆에 죽 두줄로 나란히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간호원 하나가 기계를 탁하고 touch 를 하였는데 그 때 부터는 기계가 직접 옆에 늘어 선 간호원들에게 명령을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기계로 부터 "인공호흡" 하자 간호원 중에 하나가 바로 '심폐소생술' 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계가 "Stop it"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두는 손을 딱 놓고 삽시간에 위치 이동을 하고는 척척 제자리를 잡고 선 채 그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데... . 이 건 한 두번 해 본 솜씨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절도가 있고 빠른지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그렇다면....하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투석 중에 죽는다는 것을 그 날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물어 본 적이 있었는데 간호원들은 그 때 마다 그럴리가 있느냐고 하더니만...
투석을 끝나고 오는 날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집에와서 계단을 오르고 안 방에 들어가 침대에 들어 누울 때까지 조차도 얼마나 기진맥진 한지요. 침대에 누우면 바로 약 3시간 정도 잠에 빠집니다. 그러면 아내는 힘이 드는데도 바로 부엌에 들어가서 내 저녁식사 준비를 합니다.
나는 한꺼번에 두마리 토끼를 쫒아야하는 case 입니다. 즉 당뇨와 신장문제 이지요. 이 두가지는 아주 반대의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당뇨는 흰 쌀밥을 먹으면 안되는데 신장은 또 잡곡밥을 먹으면 안됩니다. 결국 모든 음식들에 대해 이런식으로 서로 제한을 하다 보면 나는 먹을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아내는 음식을 이것 저것 피해가며 만들어 내야하는 고충이 말도 못하게 심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환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내는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야말로 눈 앞에 확실한 무언가가 잡히지 않는 Miserable 한 길이었지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외롭게 걸었어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지금까지 나를 놓고 이렇게 기도를 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세우셔서 모든 성도들의 사역을 위해 먹고 마시고 필요를 위한 모든것을 공급하는 역활과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어 마지막때에 영생을 나누어 주는 사역을 감당할 것' 을 놓고 30년 이상 기도해 온 것입니다. 아내의 눈 앞에서 거의 식물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남편을 병원에 이틀 건너 하루씩 나르는 기약없는 상황에 대하여 울부짖곤 했다고 합니다. '30년을 같은 기도를 시켜놓고 이 꼴이 무어냐' 고 따지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 기도를 했다는 사실 하나에 오히려 소망이 걸리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리시고 쓰실 거" 라는 소망을 단 한 번도 꺼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소망이 버틸 힘을 준 것입니다.
투석하고 온 다음 날은 무언가로든 영양을 보충합니다 아주 작은 양을 그것도 모든 영양면을 고려하여 아내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수년...
병원에서 나올때면 그냥 그대로 차를 타고 멀리 멀리 아내와 떠나고 싶었습니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지굿지긋한 현실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장 투석은 신장을 전혀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장을 대신하는 기계가 밖에서 돌면서 몸 안의 피를 거의 밖으로 다 끌고 나와 물과 독을 걸러서 다시 넣어 주는 역활을 하는데 단순히 목숨을 연명을 하는 것이지요.
신장이 하는 일은
피 안에 독소를 빼는 일과 (Bun, 크레아틴)
몸 안에 수분을 조절하는 일을 합니다.
물 조절이 안되면 소변을 볼 수 없으니 마시는대로 온 몸에 쌓여 출렁거리지요. 그러다가 몸이 잔뜩 붓고 허파를 누르지요. 그러면 숨이 차게됩니다. Short Breath 가 되면서 심장과 온 몸 역시 부족한 산소로 허덕입니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서 음식물이 들어가면 2가지 어려운일이 발생합니다. 인이 높은 음식은 몸에는 꼭 필요한 것이나 모든 신체 근육조직에 독성을 쌓아 몹시 아프게 만듭니다. 거의 걷지를 못 할 정도로 되는데....특히 엄지 발가락은 망치로 얻어 맞은것 같이 늘 아프지요.
또 칼륨(포타시움)이 높은 음식은 결국 심장을 Attack 하여 심장마비의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 모든 음식들은 실은 건강유지를 위하여 다 필요한 것들인데 신장 환자에게는 거의 다 독입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거의 다 제한이 되니 그야말로 몸은 바짝바짝 마르게 됩니다
그래도 하루 세 번의 음식을 해 내야만하는 아내의 스트레스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힘든 행로였습니다. 그래도 가끔 스트레스를 덜어주려고 외식을 하려다 보면….. 미국 음식이라는것이 뭐 있습니까? 소다가 포함 된 정크가 대 부분인데 특히 투석을 마치고 그런 음삭을 먹으려면 목에서 넘어가지를 얺습니다.
일식은 싱싱한 생선이 위험하지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가 무서운 것이지요. 찍어 먹는 간장은 간 없이 먹어야하는 나에게 해롭고요. 중국음식은 진해서 꿈도 못 꿉니다. 그래도 물을 마음껏 마실 수만 있다면…….
평소에 가장 좋지 않은 습관은 폭식 입니다. 미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너무나 많고 값도 싼 편인데 왜 그렇게 먹어 대었을까? 미국에 처음 들어 온 1980년대에 처음 수개월을 살면서 제가 느낀것은 모든 음식들이 너무 달고 또한 너무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마시는 각종 소다는 너무나 양을 많이 주고….. 달고....그러나 결국 저 역시 소다 Large 가 부족하여 하나를 더 시켜먹곤 하는 단계에 똑같이 가게 되더군요. 마실 수록 몸의 수분을 오히려 더 빼앗아 가서 계속 마시게 만드는 이 식품을 미국은 왜 그냥 놔 두는지?
의사선생님은 음식을 우리 주먹 사이즈 이상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배가 고프면 차라리 먹는 회수를 좀 더 늘리더라도 더 이상은 금물입니다. 몸이 비대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몸의 발란스가 깨졌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운동 부족도 있고 그 밖에 많은 중요한 원인들이 있으나 근본은 역시 발란스가 깨진 탓이라고 합니다. 몸이 비대해 지면 이를 감당해야 하는 심장, 허파, 신장, 간장이 이에 맞추어 다들 커져서 전혀 지장이 없이 가면 좋은데 이들은 그냥 자기 사이즈에서 그 큰 몸을 돌려야 하는 과부화가 걸리기 시작합니다.
원래 건강한 몸은 슬림한 상태가 자연스럽게 유지가 되는 것인데 이는 불 필요한 음식들이나 필요 이상의 음식들이 몸 안에 들어 올 경우 몸 자체가 쓰고 남는 부분을 몸 밖으로 밀어 내 버린답니다. 즉 그럴만한 힘이 있어 몸 안에 잉여물 축적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비만을 막는 것입니다.
비타민 한 알이 작지만 몸에 들어가 각종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듯이 몸이 원하는 것은 골고루 섭취해 주는 영양분들이지 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몇가지를 양으로 먹다보면 결국 배가 불러 다른 것들을 고루 먹지 못한채 영양의 결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지속적으로 자기 좋은 것에 만 입맛이 맞추어지고 습관성이 생기면 계속 특히 그것만을 좋아하고 먹게 된답니다. 이에 몸은 배는 부르지만 계속 같은 것이 들어오니 드디어 몇 군데 부족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럼 그 부족은 사람에게 그저 배가 고프다는 것으로 만 해석이 되어 같은 것을 계속 더 먹게 되고 영양의 불균형이 시작 된 것은 모릅니다. 여기서 시간이 가면 그 포만감에 만 열중하던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손과 함께 이에 따른 몸의 불균형이 생겨 몸은 수렁으로 깊이 깊이 들어 갑니다.
지금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실제 그들의 모습이 거의 아닐 수 있습니다. 좀 더 불 필요 한 것들이 붙어 있는 실은 괴상한 모습입니다. 이를 어떤 것으로든 과장해 보고 화장품으로 눌러 보지만 근본적으로 감출 수는 없습니다. 건강하면 예뻐집니다. 이것이 바로 “Natural Beauty” 이지요.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몸의 발란스가 깨지면 신장이 가장 큰 일을 담당해야 하게 됩니다. 우선 독성을 제거하지만 바로 물 조절입니다. 물의 조절에 신장이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하면 온 몸의 세포는 필요 이상의 수분을 늘 갖고 있게 됩니다. 자연 피의 순환은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써 발육 역시 원활하지 못하여 모든 장 기관이 똘똘하지 못하고 슬슬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건강은 혈색으로 부터 시작하여 나빠지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장기가 하나씩인데 하나님께서 신장은 둘을 만드셨습니다. 물론 신장 하나로도 전혀 문제가 없이 살 수 있다고 현대 의술(?)은 말하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불 필요 한 것을 만드셨을까요?
병원에서는 저의 경우 실로 오랜 동안 신부전이 있어 왔다고 합니다. 중간 중간에 좀 신경을 쓰며 몸이 내게 말하는 이야기들을 들었어야 했던 것이지요.
8월 31일 첫 번째 수술을 마치고 신장을 붙여 놓으니까 신장은 신기하게도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소변을 보기 시작하고 그 다음 날로 부터 독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와 아내가 그 수술 통증으로 인하여 정말 힘드는 것을 볼 때 신장 역시 편한 상태는 아닐텐데도 신장은 많은 일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즉시.
아내는 저보다 훨씬 고통이 큽니다. 원래 Donor 가 더 고통이 크다고 합니다. Donor 는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기 신장을 생살로 찢어내어 밖으로 내 보내야 하는데 저와 같은 Recipient 는 요새 의술의 발달로 제 신장 두개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채로 (그대로 둔 채로) Donor 의 신장을 가져다가 내 앞 배 안에 Space 를 만들어 집어 넣고 닫으면 됩니다. 물론 이것도 절대로 큰 수술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이니까요.
아내는 그야말로 산고를 통하여 저를 다시 생산했습니다. 과연 내가 입장이 바뀌어 있다면 나는 아내에게 나의 신장을 줄 수 있을까?
“너의 생일은 이제 8월 31일이야, 아내에게 더욱 감사하며 사랑하며 업고 살아라" 한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 속에서 오열 하셨습니다.
아내를 Donor 로 결정하는데는 우리 두 아들과 한 딸래미의 적극적인 자기 희생의 의지들도 동반이 되었습니다. 신장 이식의 가장 우선 순위는 역시 친 형제 자매이며 두 번째가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실은 아내는 전혀 신체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남이지요.
목사님께 다시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이제부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길을 가는데 두려웠습니다. 아니 전혀 보장이 없었습니다. 목사님과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는 결국 절대적으로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리는 순간 순간 이를 경험하며 외선을 밝기 시작했습니다.
총 6점이 되어야 완벽한 Donor 로써의 자격이 갖추어집니다.
우선 우리 두 아들들은 3점을 이미 갖고 시작을 하는데 아내는 몇 가지 검사 끝에 겨우 1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4달에 가까운 모든 건강 검진이 아내에게 적용되기 시작했고 여기서 감기 기운 하나라도 발견되면 장기 이전이 쉽지 않은 벽들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장 내시경, 심장, 허파, 병 경력, 자궁, 유방암을 비롯한 각종 암 진단 …..결국 혈액을 서로 섞어 저의 피와 싸우는가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건강 검진이 끝나는데….. 이 모든 검사 후에는 가장 어이없는 절차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수술을 몇 일 앞두고 Social
Worker 가 정부로 부터 나옵니다. 이 정부 관리의 목적은 모든 질문을 통해 아내가 신장을 나에게 주지 못하도록 독려를 합니다. 치욕감까지 주면서….. 이는 정말 주고 싶은 의지가 자의에 의해 확실히 있었는지를 보는 최종 점검이지요. 혹시 돈을 받거나 남편으로 부터 강제적인 일로 또는 누구의 억박으로 하는 수 없이 Donor 가 된 것은 아닌지를 확인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기의 분명한 소신을 밝혔고 이에 중간에 통역을 담당한 통역관과 Social Worker 은 함께 울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모처럼 마음을 먹었던 사람들이 신장 이식을 포기하고 도중하차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고 합니다.
아내는 건강했습니다. 늘 어렸을때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장모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각종 한국의 물들지 않은 수 많은 토속 음식들의 싱싱함이 아내의 근간을 이루게 한 이유였습니다. 지금 좋다고 비싼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 그 많은 “Organic” 식품을 자연 상태에서 다양하게 먹어 온 것이지요. 몸이 처음 부터 건강하게 형성이 되면 커서도 정크를 받아 들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국서 30 여년을 사는 아내는 지금도 콜라는 안 먹습니다. 아예 몸에서 처음 부터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퇴원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일생 동안 먹어야 할 약들을 타 왔습니다. (한 끼에 33알이니까 하루에 99알이지요)
약이 좀 많지요?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앞으로 가면서 점점 줄기는 한다고 합니다. 걱정이 되어 묻긴 물었지요. “내 간은 어찌 되는 거니?” 하니까 “You have no choice” 하더군요. 아무튼 이 약들과 Conflict 이 있는 Grapefruit 만 빼고는 다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앞으로 한 달은 되도록 집 안에만 있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며 3달까지는 공공장소를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 면역력 때문이지요. 일부러 면역을 떨어뜨리는 약을 먹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내 몸의 면역 체계가 얼마 전에 막 들어 온 아내의 신장을. Attack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생을 하며 새로이 받은 신장을 면역 체계가 병균으로 알 경우 잡는데는 아주 짧은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하니.....
기나 긴 꿈에서 막 일어 난 것 같아요.
이 모든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밖에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되어질 수가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니까요.
저는 어느 장로님의 간증을 듣고 정말 놀라우신 하나님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구 장로님 입니다. 아이를 나았는데 혈루병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결국 아빠쪽 엄마쪽의 일가 친척들의 모든 재산을 다 병원비로 탕진해 버리고 12세 되던 어느 날 드디어 다리 위에 서서 아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 때 아이가 “아빠 살려 주세요” 하더래요. 그 후 기도원 굴 속에 양초를 수도 없이 태우고 기도하여 결국 이 아이를 살리고 서울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류의 아이들을 위하여 무언가 시설 마련이 필요해서 무조건 땅을 하나 골라놓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것도 서울 주변의 그린벨트를 우선 싼 값에 사서 유황온천을 기도로 구 한 것입니다. 그냥 아무 근거없는 그린벨트 일부를 사서 온천을 파라고 하니까 땅 파는 회사가 확신없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고 1200미터를 들어가도 안나오니까 중단에 이르렀는데 이 때 다시 기도 굴에 들어 간 구 장로님은 200 미터를 더 파게하고 결국 한국 최고의 질을 갖춘 유황온천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설명이 안되지요. 아마 하나님께서 땅 속 어디에선가 호수를 가져다가 그 땅 밑에 꽂아 주신 것 같습니다.
겨우 1점으로 시작한 아내의 상태는 현대 의학의 발달로 부족한 부분 부분이 맞추어지며 갔지만 그 맞추어지는 과정속에서 일어난 수 많은 일들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기적들로 아니 은혜로 풀어져 갔습니다.
누워있으면서 꼼짝 못하고 고통 중에서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했습니다. 오직 기도 밖에는 길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라
하나님은 죄를 가만 보시지 않는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으로 부터로만 온다.
나의 남은때는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다 드려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단어가 충분치 않아 표현을 다 못하는 은혜 속에 있어요. 감당치 못 할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찬양합니다. 억만개의 입술이 있다고 해도 찬양과 감사 밖에는 갚아 드릴 방법이 없네요.
생명을 다시 보는 그 기쁨과 감사는 이제 제 전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또 우리 교회 식구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