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0. 12:54ㆍ카테고리 없음
용서
용서라고 하면 좀 더 우위에 선 쪽 (옳다고 주장하는 쪽) 에서 그에게 대해 무언가 잘못을 한 자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영어로는 ‘forgiveness’ 인데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과오를 더 책망하지 않는 것을 의미’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라는 말의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뜻을 살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적인 용서라는 의미와는 너무나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다루어 집니다.
성경에서 용서의 의미는 아예 “그 사람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 버린다” 는 것으로 즉 “모든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 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수긍이 갈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참으로 힘들고 어찌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히 10:16-18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일본인들은 나뭇잎을 따서 그 위에 모든 것들을 실어 물에 떠 내려 보낸다는 표현을 씁니다.
의학적으로 증명되기로는 모든 기억 특히 매우 뜻 밖이며 충격적인 경험들은 두뇌의 기억속에서 뿐만 아니라 몸의 모든 세포 세포가 다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 당시에 함께 기억 저장된 횐경을 만나거나 연상이 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뇌에서 지워졌다고 믿어도 온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소위 쓴 뿌리가 무의식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과연 진짜 지워 질 수 있을까?”
실상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서” 라는 단어는 땅에 속한 단어가 아니라 ‘하늘 용어로써의 그 완벽함을 가진 용어’ 의 그림자라고 말하는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보면 우리에게는 이런 단어를 쓸 기본적인 자격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한 용서이며 또한 어떤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냐는 것 부터 문제가 따릅니다. 용서의 주체는 과연 그 입장에 서는 것이 맞으며 또는 옳으며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만큼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마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성경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쪽에 대해서도 그 자세와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의 겉 모습과 표피적인 삶이 기준이 되어 진정성이 없다면 오히려 용서 받는쪽도 자격이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용서를 할 가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징벌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 즉 하늘에 속한 용어를 사용함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 전체가 이를 중요시하고 연결되어 다루는 매우 강력한 약속이 따라옵니다.
마태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말씀에 따른 하나님 나라로 부터의 보장을 그리고 함께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위에 언급한 내용은 불완전한 제시와 시도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우리가 아는 수준에서지만)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용서를 하는 측을 위해서라도 이를 꼭 순종하라시는데 그만큼 진정한 실천이 쉽지 않으나 여기에는 천국 백성의 삶으로의 간곡한 초청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에 따라 이를 이해하고 실천하고 체험해 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용서" 에 대하여 그 의미와 실제로 내게 다가오는 은혜를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를 해 본 입장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용서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즉 무언가 나 처럼 앙금을 가지고 나를 대하고 계실 것이라는 오해와 의심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가 내것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완벽한 용서를 받아 본 경험도 또한 느껴 보지도 못하면 용서 이 전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내 안에 긍휼과 자비가 형성되지 않은 발판에서 표피적인 즉 상호 깊은 인식이 부재한 용서가 나오게 되어 내 안에 쓴뿌리와 뒤끝을 함께 형성하게 되지요. 문제는 이 때 상대도 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용어는 그냥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느껴지고 자진해서 행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용서가 중심에서 일어나 깨닫고 행해지지 않으면 복음적인 면에 있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이른자 인가에 대한 자체적인 주관적/객관적 부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진짜 죽고 사는데 대한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대해 좋은 예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 18:23-34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사실 우리 모두는 일만 달란트 빚진자에 해당하겠지요? 실제로 하나님 앞에 죄사함이라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비교가 될 만큼 중요한 ‘인간사’ 라는 것은 “없다” 가 정답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것이든 내게와서 잘못을 시인하고 긍휼을 구하면 이를 거부 할 수도 또 해서도 안되는 성경적 근거가 성경 전체에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지요.
마태 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결국 바른 용서를 알고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